Annoying Music in Everyday Life(Felipe Trotta, Bloomsbury Academic, 2020)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에 근거하여 내 생각을 정리하면서 소음에 관한 생각이 조금 더 넓어졌다. 소음은 정의(define)되기 보다는 구성(construct)된다. 더 나아가 소음은 대상(object)이라기 보다 관계(relation)다.
예컨대 ‘통제’(control)가 소음을 결정하는데 중요하다. 내가 소리의 크기, 시간, 장소 등을 통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소음으로 여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통제하지 못한다면? ‘새어나오는’ 소리도 소음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하철에서 옆 자리 앉은 사람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모기소리 같은 음악처럼. 통제가 소음과 관계있다면 소음은 기본적으로 ‘권력관계’다.
당연히 ‘취향’(taste)도 소음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 해도 내게 싫으면 소음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취향은 누구의 것인가? 부르디외라면 내 것이 아니라 내 계층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취향이 사회적 요소라면 소음은 ‘사회관계’다.
소음은 ‘참을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소리가 얼마나 자주, 얼마나 오래,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누구에게서 나느냐가 소음을 결정하는데 중요하다. 그것은 결국 타자와의 문제다. 타자의 소리를 어떻게 견디느냐, 타자가 소리로 내 공간을 침투하는 것을 어떻게 견디느냐, 즉 ‘타자와의 관계’다. 타자와의 관계는 곧 ‘윤리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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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인용된 Marie Suzanne Thompson의 주장 또한 흥미롭다. 그 동안 소음은 음악과 상반된 것으로 정의되었다는 것이다. 음악이 조직된 소리라면 소음은 조직되지 않은 소리라는 것이다. 소음은 원하는 소리(음악)가 아니라 원하지 않는 소리(소음)이라는 것이고 의도된 소리(음악)가 아니라 의도되지 않은 소리(소음)이라는 것이다. 음악과 소음은 각각 A와 B로 정의된 것이 아니라 A와 A의 결여(not A, -A)로 정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음은 실은 창조적 혹은 변형적 힘을 가졌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실로 그렇다. 소음은 음악작품에서 긴장을 창조하고 양식사에서 변화를 만들어 낸다. ‘바로크’라는 시대의 이름은 실제로 ‘소음’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고, 비유적으로 확대해 말해도 ‘소음’ 없이 새로운 일은 생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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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는, 소음에 대한 이런 배부른(사변적) 소리 말고 지금 이 순간도 나를 괴롭히는 윗집 아이의 쿵쿵대는 소리에 관한 것이다. 소리 무기나 소리 고문 같은 예는 아마도 소음의 ‘관계성’을 쉽게 뛰어넘는 인간 몸의 한계에 관한 이야기와 연결될 것이니 이런 것이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집중적 고찰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리가 내 영역과 타인의 영역을 어떻게 구분하나, 타인의 소리가 어떻게 내 영역에 침투하고, 언제부터 이런 일이 시작되었나 같은 것들. Ian Biddle의 “Love thy Neighbour? The Political Economy of Musical Neighbours”(Radical Musicology, Vol. 2, 2007)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읽는데 꽤 시간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