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집에 대한 로망이 있다. <구해줘 홈즈>, <서울엔 우리집이 없다>, <나의 판타집>, <신박한 정리> 등 집 관련 예능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거실은 이렇게 침실은 저렇게…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상상 속 집 꾸미기가 이토록 즐거운 이유는 뭘까. 답은 뻔하다. 상상 속 우리집은 최대한 쾌적한 모양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엌은 반개방형으로, 거실 정면엔 노먼시계를, 복도 끝에는 김동우의 조각을, 서재 벽지는 회보라색으로. 내 맘대로 구획하고 내 맘대로 색칠하고 내 맘대로 장식한 바로 그 공간 안에서는 작은 호흡마저 자유이리라.
내 맘대로 지은 집은 나의 동선을 최대한 고려하고 있을 것이다. 내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것임도 물론이다. 그러니 움직임도 눈도 편할 수밖에 없다. 어디 주거 공간뿐이랴. 일하는 공간, 물건을 사고 파는 공간,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공간, 강연 하고 듣는 공간 모두에는 다 머무는 이들의 움직임과 눈에 대한 크고 작은 배려가 깃들어 있다. 움직임과 눈에 대한 배려는 효율성을 잣대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효율성이란 것은 결국 공간을 오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만족감에 바탕을 둔 것이다. 내 몸이 편안하고 내 눈이 즐거워야 공간이 요청하는 일들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 눈을 기쁘게 하기 위해 꽤 많은 정성을 쏟는다. 벽지 하나 정할 때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가. 토스터기 하나를 살 때에도 색상과 모양이 우리집 부엌에 잘 어울리는지 고민한다.
그런데 우리 귀의 즐거움은 어떤가? 우리 귀는 충분히 배려되고 있는가? 귀의 즐거움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요즘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고 있는 층간소음일 것이다. 층간소음은 소리를 내는 쪽이나 듣는 쪽 모두 소리에 민감하게 만든다. 소리 내는 쪽의 대처는 꽤 적극적일 수 있다. 슬리퍼를 신고 바닥에 매트를 깔아 어떻게든 소리의 전달을 막는다. 반면 듣는 쪽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칼부림 같은 극단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일 테다.
눈에 대한 우리의 간섭은 적극적이다. 아래 위 색을 맞춰 옷을 입는 것도 모자라 신발도 이것저것 바꿔 신어 본다. 반면 귀에 대한 우리의 개입은 많은 경우 소극적이다. 문을 꼭 닫아 시끄러운 소리의 침입을 막거나 음악을 크게 틀어 침투된 소리를 가려버리는 정도다.
그렇다고 우리 삶의 공간을 채우는 소리에 대해 우리가 마냥 소극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러 명이 함께 쓰는 사무실, 혹은 온갖 소리로 넘쳐나는 거리에서 우리는 이어폰을 연결해 나만의 소리 공간을 손쉽게 창출한다. 혼자 사는 적막함은 TV에서 흘러나오는 들썩이는 소리들로 쓸어버린다. 지겨운 일을 해치울 때에는 유튜브에 가득 찬 ‘노동요’들이 안성맞춤이다. 사실 소리의 효용성은 비밀도 아니다. 쇼핑몰에 틀어놓은 음악이나 광고에 삽입된 소리가 소비심리를 자극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진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리가 시각 환경에 대해 그런 만큼이나 소리 환경에 대해서도 주도권을 행사한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려워 보인다. 물론 기술의 발전이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은 권한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듣고 싶은 음악들을 우리 마음대로 배열하여, 듣고 싶은 순서대로 파트별 음량까지 조정하여 아무 때나 들을 수 있다. 유튜브에 넘쳐나는 ASMR들은 각양각색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상의 훌륭한 파트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 환경에 대한 우리의 개입은 여전히 시각 환경에 대해서만큼 다채롭고 촘촘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서일까? 공공미술은 있지만 공공음악은 없다. 우리나라에는 ‘건축물미술작품제도’가 1995년부터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연면적 1만㎡ 이상의 건축물을 신·증축하는 경우 건축비의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미술작품의 설치에 사용하거나 문화예술진흥기금에 출연하도록 하는 제도다. 이에 해당하는 제도가 소리에 관련해서는 없다. 물론 청각이라는 감각양상이 갖는 특수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특수성을 극복하는, 아니 바로 그 특수성 때문에 더 매력적인 소리 공공재를 창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의 소리 환경은 최대한의 청각적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척되고 설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리를 구해줘>, <나의 판타소리>, <신박한 소리 설계> 같은 프로그램들이 우리 귀를 사로잡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전망한다면 지금은 좀 성급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혹시 누가 알랴. 한양대 음악연구소의 연구를 통해 그런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오게 될 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