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테너 가수는 카스트라토의 대역이자 옛 팔세토(가성) 가수의 단절된 후손이다. 카운터테너는 과거를 복원하기 위해 전통을 ‘창조’해낸 경우라 할 수 있는 만큼 논란 또한 따른다. 카스트라토 대역으로 카운터테너가 연주 관행에 부합하는가라는 역사적 타당성이나, 카운터테너의 음색이 옛 카스트라토와 비슷한가라는 실용적 질문이 떠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카운터테너가 윤리적으로 결백한 ‘합리적’ 대안임은 분명하다.
최후의 카스트라토 알레산드로 모레스키(Alessandro Moreschi, 1858~1922)의 유일한 녹음은 (열악한 음질과 모레스키의 나이를 떠나) 카운터테너의 소리와 결이 다르다. 게다가 카운터테너 가수 스스로도 ‘진화’하고 있다. ‘최초’의 카운터테너 가수 알프레드 델러Alfred George Deller, 1912~1979)와 지금의 가수와 비교해도 변화는 명확하다. 이는 현대 음악대중의 취향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고운 목소리의 중성적 음색의 가수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내가 꼽는 이러한 가수의 전형은 필리프 자루스키(Philippe Jarrousky)지만 최근 한 명이 추가되었다. 이스라엘 태생으로 영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야니브 도르(Yaniv D’Or)다.
도르는 오페라 무대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자신이 발표한 앨범은 이와 결이 다르다. 도르가 발표한 네 장의 앨범 중 셋은 도르의 뿌리인 세파르디 유대인의 전통을 재조명한다. 클래식 고음악과 포크, 월드뮤직의 경계에 서있는 발표작에서 도르는 세파르디 유대인의 정취를 중성적인, 어쩌면 여성 화자’처럼’ 들리게 노래한다.
당대 연주가 낭만주의, 심지어 20세기 초의 작품에 침투한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카운터테너만큼은 예외였다. 카스트라토 레페르투아의 한계 때문이다. (일부는 퓨전, 크로스오버 작업으로 눈을 돌리곤 했다.) 그래서 ‘전통’ 클래식 레페르투아 앨범 (Naxos, 2017)에서 도르의 시도는 대담하다. 앨범에서 도르는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Op. 48과 낭만주의 말, 20세기 초의 몇몇 노래를 자신의 ‘음역’으로 노래했다.
도르의 섬세하고 고운 음색에 매료될 수도 있지만, 이내 달콤함 속에서 불편함을 느낄지 모른다. 물론 늘 듣던 중저음의 남성 목소리에서 벗어난 이질감이 다가 아닐 테다. 혹은 남성 시인이 노래한 ‘남성’ 화자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서일까? 사실 여성이 부른 <시인의 사랑>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 여성 가수도 종종 이 연가곡을 불러왔다.
어쩌면 카운터테너 가수 도르가 카스트라토의 대역 정체성이 아닌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고정된’ 전통 클래식 레페르투아로 진입하는 데 대한 거부감일지 모른다. 현대의 카운터테너는 카스트라토 모레스키와 핏줄이 다르고, 카운터테너 알프레드 델러와 모습이 달라졌다. 카운터테의 소리 자체는 물론이고, 이제는 그 역할도 변해가는 시대임을 도르는 예시한다. <시인의 사랑>의 문제는 카운터테너의 역할(이를테면 음악영역의 확대)이 표면적인 음악적 문제보다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젠더의 문제와 엮여 있다고 알린다.
우리의 머리가 (‘정상적’ 남성이 아닌) ‘중성적’인 카스트라토를 이해하고 (사실 그것도 쉽지는 않았겠지만), 우리의 감성이 카스트라토의 합리적 대체자 카운터테너를 받아들인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요는 카운터테너가 대체자로서의 역할을 벗어던진 채 고유의 ‘인위적 중성성‘(그러니까 ‘비생물학적 중성성’)을 내세워 이미 구축된 ‘남성적'(실은 여성에게도 개방된) 레페르투아의 젠더관을 흔든다는 불편함이 아닐까? (이러한 젠더의 문제는 우리 연구소에서 다룰 문제다.)
도르의 앨범과 같은 비전통적 해석은 이미 우리의 의식이 변하고 있기에 가능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흥미로운 시도를 가능케 한, 혹은 ‘해야 만’하는 클래식 음악’시장’의 현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